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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광'에 해당되는 글 3건

  1. 화성 공룡알 화석지
  2. 빙월당
  3. 경주 대릉원 일원

화성 공룡알 화석지

국내관광지

2000년 3월 21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1999년 4월 25일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일대에서 시화호 간척지의 육지화에 따른 생태계와 지질 변화에 관한 기초조사를 벌이던 중 시화호 남쪽 간척지에서 발견되었다.바닷물이 막히기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었던 이 지역은 중생대 백악기(1억년전으로 추정됨)에 형성된 퇴적층으로 공룡알은 시화호의 해수(海水)가 빠져 나가면서 육상에 노출된 섬의 표면이 풍화와 침식에 의해 깎여 나간 표면에 주로 노출되어 있었다.지금까지 조사된 12개 지점에서 둥지 30여개에서 200여개에 달하는 공룡알이 발견되었고, 현재 뻘로 덮여있는 부분에 대한 정밀조사가 이루어지면 더 많은 화석이 발견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대부분의 공룡알 모양은 구형이며 검붉은 색을 띠고 있다. 공룡알 껍질의 표면을 보면 미세한 구멍이 있는데 이를 통해 태아는 이산화탄소, 산소, 수분을 교환한다. 공룡알에는 다른 알들에 비해 이러한 숨구멍이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는 현재보다 연평균 기온이 높았고 극지방에도 빙하가 없을 정도로 온난다습했기 때문에 산소를 많이 호흡하기 위해 알껍질에 많은 숨구멍을 발달시킨 결과이다.그러나 숨구멍이 많으면 호흡작용에는 크게 유리하지만 수분을 잃는 단점도 생긴다.이를 방지하기 위해 공룡들은 땅속에 구덩이를 파고 알을 낳은 후 모래로 덮어 알의 수분 손실을 막았다.

한편 공룡알 화석의 윗부분은 거의 모두가 깨져있는데 이 중 껍질 파편이 공룡알 속의 아래 부분에 쌓여있는 것들은 부화되기 전 다른 동물에 의해 먹힌 것이고, 껍질 파편이 알 속에 나타나지 않은 것들은 부화되어 새끼 공룡이 떠난 것으로 보인다.또한 자갈들과 함께 껍질 파편들이 알 속에 나타난 것들은 갑작스런 퇴적물의 퇴적으로 둥지가 덮쳐져 부화되기 전에 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공룡알은 껍데기의 단면 형태로 보아 목과 꼬리가 긴 4발의 용각류와 오리주둥이공룡 등 조각류의 공룡알로 추정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공룡알 화석과 함께 줄기에 마디가 있는 늪지의 갈대 등 규화된 식물화석과 저서생물의 흔적화석들도 대량 발견되었다. 다양한 식물화석 등이 공룡알 화석과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공룡의 먹이와 산란지 환경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화성의 공룡알 화석지는 공룡발자국 화석에만 의존하던 한국의 고생물학계가 한 차원 높은 공룡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하였을 뿐 아니라 한반도를 세계적인 공룡 화석지로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어 세계의 유수한 학자들이 이곳을 견학하기 위해 앞다투어 화성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 문의 및 안내화성 공룡알 화석지 031-357-3951
  • 홈페이지공룡알 화석산지 방문자센터 http://dinopia.hscity.go.kr
  • 주소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공룡로 659
  • 이용시간09:00~17:00 (동절기 : 10:00~17:00)
  • 휴일매주 월요일,1월1일,설,추석,연휴
  • 주차방문자센터 주차 가능 29대 (대형 4대, 중·소형 25대)
  • 지정현황[화성 고정리 공룡알화석 산지] 천연기념물 제414호 (2000.03.21 지정)
  • 시각장애 기타상세해설자 있음
  • 점자블록점자블록 있음_시각장애인 편의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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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월당

국내관광지

* 성리학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을 배향하는 곳, 빙월당 *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을 배향하였으며, 백우산 기슭 광곡(너브실) 마을에 있다. 기대승의 장남 기효증이 1607년(선조 40)에 아버지를 추모하여 지었으며 1938년 기대승의 후손에의해 이전·개축되었다. 월봉서원은 당초 고봉을 추모하기 위해 고봉 사후 7년 만인 1578년(선조11)에 낙암(현 신룡동)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고 동천(현 산월동)으로 옮겨서 건립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941년 현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지었다. 이어 1978년부터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의 건립에 착수, 1981년 모두 준공을 보았다. 빙월당의 당호는 정조가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빙월설월(氷月雪月)」의 뜻으로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빙월당이 자리 잡은 곳은 백우산 기슭 광곡(너브실)마을의 원 종가터인데 높다란 대지 위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매우 풍치가 아름답고 경내도 조용하다.

* 빙월당의 건물 *

빙월당은 후손에 의해 원래의 건물이 이전되거나 개축되었고, 또한 소실된 건물을 복원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후손에 의해 복원된 여러 건물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사당](祠堂) - 정면3칸, 측면2칸반의 팔작집, 정면 반칸은 퇴로 개방되어 있다. 41.98m² (건평 12.7평)

[강당](氷月堂) -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양측 1칸씩은 모두 퇴간(退間)인데 전면과 우측 반칸에는 툇마루를 설치했다. 안쪽으로는 후면 반칸을 포함 좌측 2칸에 온돌방을 꾸미고, 우측 3칸에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을 꾸몄다. 84.29m²(건평 25.5평)

[장판각](藏板閣) - 빙월당 우측에 있는 원래부터 있던 장판각과 좌측에 있는 새로 만든 장판각 2동이 있다. 본래의 것은 정면, 측면 모두 1칸 규모의 맞배집이며, 새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2동의 건평은 도합 26.44m²(8평)이다. 새 장판각에 고봉집(高峯集), 논사록(論思錄), 왕복서(往復書), 이기왕복서(理氣往復書)등의 목판(木板) 474매가 보존되어 있다.

[내삼문](內三門) -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솟을삼문. 13.55m²(건평 4.1평)

[외삼문](外三門) - 내삼문과 같은 솟을삼문. 12.56m²(건평 3.8평) 원래 월봉서원은 1655(효종6)에 사액(賜額)되었고, 사우(祠宇)와 동제(東齊)- 명성제(明誠齊), 서제(西齊) - 존성제(存省齊), 강당(講堂) - 충신당(忠信堂)이 갖추어졌는데 월봉서원의 액호(額號)는 이산로, 나머지 편액은 송준길이 썼던 것인데, 현판들은 현재 장판각에 보존되고 있다.

*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 기대승에 대하여 *

기대승(1527~1572)은 조선중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자는 명언, 호는 고봉이며, 시호는 문헌이다. 광주 소고룡리 송현동(현 광산구 신룡동)에서 성리학자인 기진의 2남으로 태어났다. 이퇴계와 김하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선학을 놀라게 하는 새 학설을 제시하여 존경을 받았다. 사단칠정을 주제로 한 왕복서한을 이퇴계와의 사이에 주고받은 이른바 사칠이기론은 너무도 유명하다. 1549년 사마시을 거쳐 1558년 문과에 급제, 156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았고, 종사관(從事官), 집의(執義), 전한(典翰),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했다. 1572년 대사간에 올랐으나 병으로 벼슬을 하직하고 귀행중 45세의 나이로 고부에서 별세했다. 종계변중의 진문을 써서 명(明)나라에 보낸 공로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추록되고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 소유자 - 행주 기씨 문중
* 수량 - 일원
* 시대 - 조선시대
* 규모 - 사당, 빙월당, 장판각(2동), 내삼문, 외삼문

상세정보

  • 문의 및 안내062-960-8252
  • 홈페이지http://www.cha.go.kr
  • 주소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133
  • 주차없음
  • 지정현황[빙월당]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1979.08.03 지정)
  • 입 장 료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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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 일원

국내관광지

* 경주 노동리 고분군

경주 중심부인 노동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신라시대 무덤들로, 봉황대/식리총/금령총등이 포함되어 있다. 봉황대는 높이 22m, 지름 82m로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무덤이다. 봉황대 남쪽에 있는 식리총은 봉분 높이 6.5m, 지름 30m로 1924년에 조사한 결과 덧널(곽)을 설치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임이 밝혀졌다. 내부에서는 귀고리, 유리옥의 가슴장식과 은제허리띠, 은팔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쌍룡 고리자루큰칼, 말갖춤(마구), 옷칠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금관이나 금동관이 없는 대신 금동제신발 (식리)이 발견되었는데, 문양이 독특하고 매우 우수하여 이 무덤의 이름을 식리총이라 하였다. 봉황대의 남쪽에 있는 금령총 역시 1924년에 조사된 무덤으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바닥에 냇돌과 자갈을 깐 높이 4∼5m, 지름 약 18∼20m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금관, 금제귀고리, 금팔찌, 금제허리띠, 동제신발, 철제솥, 옷칠그릇, 유리그릇, 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 중 배모양 토기와 기마인물 토기가 특이하다. 이 무덤은 규모가 작으며, 금관과 장신구의 크기가 작고 순장의 흔적이 보여 신라 왕자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봉황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면적 - 16,902㎡)

* 경주 노서리 고분군

경주시 서북쪽 노서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현재 1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남아있다. 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제130호 무덤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와 대칭을이루어 서봉황대라 불린다. 노서리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서봉총/호우총/은령총 제138호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쌍상총·마총·우총 등은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으로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금관총은 1921년에 조사되었는데,금관과 금제허리띠를 비롯한 각종 호화로운 금공예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서봉총은 표주박 모양 쌍무덤의 북쪽 무덤으로, 봉황장식이 달린 금관이 출토되었다. 또한 연대를 새긴 은으로 된 뚜껑이 있는 그릇(은합)이 출토되어 5세기 전후에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은령총과 쌍무덤을 이루는 호우총은 광복 후 최초의 유적발굴로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을묘년(451)에 만들었다는 글자가 쓰여진 동합이 출토되었다. 쌍상총·마총·우총 등은 통일신라 초기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쌍상총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조각이, 마총에서는 말뼈와 안장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노서리 고분군은 노동리 고분군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돌무지 덧널무덤과 전기 돌방무덤이 밀집해 두 종류의 무덤 교체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경주지역의 무덤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면적 - 44,200㎡)

* 경주황남리고분군

경주시청 남쪽 건너편 일대의 고분군이며 미추왕릉(味鄒王陵)을 비롯한 약 250기(基)의 고분이 있으며 고분공원이 조성되었다. 1973년에는 천마총을 발굴하여 금관 및 천마를 채색으로 그린 백화수피장니(白樺樹皮障泥)가 나와 신라시대회화로서는 유일최고(唯一最古)의 것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데, 지금은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있게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또한 고분중에 가장 큰 황남대총 98호은 1973∼75년 사이에 발굴 후 복원하였는데 통일신라 이전에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 소형석곽분(小形石槨墳)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 연혁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있는 은제 허리띠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세정보

  • 문의 및 안내054-750-8650
  • 홈페이지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 지정현황사적 제512호(2011.07.28 지정)
  • 입 장 료[천마총 - 09:00~22:00]
    개인) 성인 3,000원 / 청소년,군인 2,000원 / 어린이 1,000원
    단체) 성인 2,400원 / 청소년,군인 1,600원 / 어린이 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