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능이다. 사적 191호인 이 릉은 왕과 왕비를 쌍릉 형식으로 모셨으며, 능앞에는 비석 1기와 상석이 놓여있고, 장명등 1기가 서 있다. 또한 양쪽에 문.무인석이 2구, 석호 1기가 있으며, 석물의 양식과 수법은 간략하고 소박해서 고려 여러 왕릉의 전통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한편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이 있어, 어느 쪽이 진짜 공양왕의 무덤이냐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너리굴문화마을은 비봉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너리굴문화마을에서 ''너리굴'' 이란 말은 안성 토박이 말로, 백두산 천지부터 시작된 산맥이 차령산맥의 끝부분인 비봉산 자락에서 넓은 골짜기가 되었는데 그것을 ''너리굴''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너리굴문화마을은 자연과 예술이 한데 어울려 있는 마을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엄마목장
너리굴 엄마목장은 사슴이 살기 좋은 최적의 환경을 지니고 있다. 비봉산 정상에서 샘솟는 청정한 약수, 주변의 공장이나 마을, 논밭,과수원, 축사 등과 완벽하게 분리된 공간지형, 질 좋은 사료를 제공해주는 풍부한 야초들과 울팡한 나무들이 사슴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 자연방목 방식으로 자유롭게 넓고 푸른 초원을 뛰어다니는 사슴들은 일상에 지친 도시인들에게는 목가적인 풍경의 휴식처이자, 어린이들에게는 자연학습의 장이 되어 준다.
* 산책로
등산로가 버거운 사람들은 가벼운 기분으로 산책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숲 사이에 가르마처럼 난 오솔길 산책로가 산을 빙 둘러 나있다. 엄마목장이 끝나는 자락에 오른쪽으로 좁은 길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산책로로 들어가는 입구, 무엇보다 주변경관이 뛰어나고 길이 평탄해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산 중턱에서 만나게 되는 탁 트인 공간은 안성 시내의 고즈넉한 변두리 풍경을 그림처럼 펼쳐 보여준다.
너리굴 미술관은 현대적인 양식의 세련된 절제미 속에 고아한 아취를 담고 있는 미술전시공간이다. 개관 이래 작가 권용자의 <누드 크로키 전>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진 중견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해왔다. 특히 예술가들의 집성촌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예술인들이 모여있는 안성 내에서 쓰임새 많고 특색있는 전시 발표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너리굴아트숍은 단순히 다양한 종류의 소품을 판매하는 장소가 아니다. 너리굴에서 행해지는 여러가지 문화 예술프로그램의 결과물들이 한데 모여있는 독특하고 이색적인 공간이다. 원하는 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구입할 수도 있으며 도자기, 액세사리, 생활소품 뿐만 아니라 무형문화재 이경자 선생의 금속공예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이 이외에도 동물농장, 입사박물관, 야외공연장, 조각공원 등 여러가지 볼거리가 많다. 또 금속공방, 조소공방, 조각공방, 도자기공방들은 여러가지 재료를 이용해서 우리생활에 사용되는 다양한 물건들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곳으로 자신이 손수 만든 여러가지 소품과 생활용품들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함이 있고 귀중한 체험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학생들에게 유익한 전통문화교실과 과학교실은 전문 선생님들의 재밌는 강의와 실습으로 이루어져 학생들에게 유익한 학습의 장 역할도 한다.
당포성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수직단애를 이루지 않는 평지로 연결된 동쪽에만 돌로 쌓아 성벽을 축조했습니다. 동측 성벽은 길이 50m, 잔존높이 6m정도이며 동벽에서 성의 서쪽 끝까지의 길이는 약 200m에 달하고 전체둘레는 450m 정도입니다. 성 축조에 이용한 돌은 대부분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현무암을 가공하여 쌓았는데 이는 고구려 성의 큰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당포성의 배후에는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마전현이 자리하고 있어 양주분지 일대에서 최단거리로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기에 당포성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남하하는 적을 방어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위치이므로 신라의 점령기에도 꾸준히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뒷편에 놓인 다리로,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만 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귀환하였기 때문에 ''자유의 다리''라고 명명되었다.
원래 경의선 철교는 상·하행 2개의 다리가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다리의 기둥만 남아 있었는데 전쟁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서쪽 다리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이 임시다리를 설치했다. 당시에는 포로들이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와서는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왔다고 한다.
자유의 다리는 길이 83m, 폭4.5m, 높이 8m 내외이다. 다리는 나무를 짜맞추어 만들었는데 특히, 힘을 많이 받는 부분은 철재를 혼합하여 사용하였다. 임시로 설치한 다리이므로 건축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